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독일 공군(나치 독일) (문단 편집) === 제2차 세계 대전 독일 공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치 독일 공군 - Bf109 편대.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치 독일 공군 - Bf109 편대 2.jpg|width=100%]]}}} || ||<-2> '''[[Bf 109|{{{#fff Bf 109}}}]]'''[* 두 사진 다 엔진에 벌지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G-5 이후로 보이는데 일단 원출처에서는 두 사진 다 G-6로 설명하고 있다. 오른쪽은 조종석 유리에 신형 캐노피였던 에를라 하우베(Erla Haube)가 적용된 모습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치 독일 공군 - he 111 편대.jpg|width=100%]]}}}||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나치 독일 공군 - 슈투카 편대.jpg|width=100%]]}}} || || '''[[He 111|{{{#fff He 111}}}]]''' || '''[[Ju 87|{{{#fff Ju 87}}}]]''' || 전쟁 초기에는 매우 활약했다. 독일 공군이 [[스페인 내전]]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전술적 전과를 늘렸으며, 전세계 공군의 표준 전술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이곳에서 처음 생긴 [[슈밤 대형]]은 연합군에서 그대로 모방했고, 현대의 공군 전술의 표준이 되었다.] 격추 수를 보면 세계 1위(격추수 352기) [[에리히 하르트만]], 세계 2위(격추수 301기)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 세계 3위(격추수 275기) [[귄터 랄]] 등 전 세계 격추수 100여기 이상 명단은 전부 독일군 격추수 순위 명단이다. [[http://en.wikipedia.org/wiki/List_of_World_War_II_air_aces|공군 에이스 목록]]을 보면 '''공인 100기 이상 격추 명단에는 전부 독일 공군밖에 없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 당시의 [[핀란드]]의 [[에이노 일마리 유틸라이넨]]이 소련(러시아)과 나치 독일 94기 격추를 기록하여 비독일군 중 최고 기록이다.] 숫자는 대략 100여명에 이르며 그 아래로도 거의 50대 격추 기록까지는 대부분 독일 공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현대의 전술기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와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격이 비싸지고 대수도 적어졌으며 대규모 분쟁도 없으니 깨질 가망이 없다.[* 당시에는 레이더도 야간 중전투기에나 겨우 달리고 제트엔진도 대전 후기에 와서야 등장했고 각종 항공전자장비도 없거나 매우 빈약하다 보니까 비행기의 가격이 현대에 비해 매우 저렴했다. 우편도 대부분 비행기편으로 할 정도였고 대공황이 오기 전까진 경비행기를 가지고 있는 가정도 훨씬 많았다. 이는 각국의 군대에서도 마찬가지. 물론 독일의 [[Ta 152]]나 일본의 [[M6A 세이란]]같은 최근 기준으로 환산해도 굉장히 비싼 예외 사례도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독일 공군이 이런 대기록이 가능했던 것은 독일이 1920년대부터 공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을 한 것과 더불어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처형되거나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좌천으로 인한 군부 인력 쇠퇴로 '독일군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는 대규모 병력의 독소전쟁 초기 소련 공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공군이 격추시킨 67,000대중 46,000대가 소련 공군을 상대로 올린 전과인 반면 전체 손실 43,000 ~ 49,000대 중 소련 공군의 전과는 최대로 잡아도 1만대 미만임을 고려하면 영미군에 의한 손실이 3만대를 넘긴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소련 공군이 없었다면 독일 공군의 이런 대기록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당장 독일군 최고 에이스인 하르트만의 격추기록 352대중 350대가 소련 공군을 상대로 세운 기록이고 2위인 바르크호른은 301대 전부가 소련 공군을 상대로 세운 기록이며 3위인 귄터 랄의 275대중 272대가 소련 공군을 상대로 세운 기록이다.[* 소련 공군은 질적인 발전이 정체되어 있어서 전쟁 중반부터는 소련 공군이 독일 공군의 20배에 달하는 엄청난 물량을 들이밀었기에 이전에 비하면 조금 더 힘들어지기는 했지만 질적으로 덜떨어진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고 독일의 패망 직전까지도 손 쉬운 상대였다. 영미가 전투기로는 못쓸 물건이라고 악평한 P-39가 소련 공군이 운용한 가장 고성능 기체의 하나라는 점만 보더라도 그 질적인 수준에 대해서 더 설명이 필요없다. 동부전선에서 독일 공군이 숫적 열세에 시달린 건 영미의 공습을 저지하기 위함으로 전투기의 75% 이상이 서유럽의 방공전에 투입되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길게 갈 것 없이 서부전선에서는 영국 본토 항공전을 끝으로 제공권을 상실하면서 사실상 은퇴한 He 111이나 Ju 87같은 폭격기들이 전쟁 말기까지 제공권이 소련 공군에 완전히 잡히지 않았던 동부전선에서는 1945년까지도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했다. 서부전선이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반면 소련 공군보다 질적으로 뛰어난 영국 공군과 미국 육군 항공대를 상대로는 약 2만 여대를 격추시키고 3만여대를 손실하여 전과 자체는 제법 올렸지만 소련 공군을 상대하는 것에 비해서 손실비가 훨씬 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전과의 가치를 판단하는데 있어서 '''출격횟수와 상대했던 적군의 실력, 그리고 상대했던 적의 규모는 조종사의 생환률과 직결되므로''' 소련 공군의 실력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100대 이상 격추의 폭발적 전과 기록이 엄청난 수의 무능한 소련 공군을 잡아서 얻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독일 공군의 이러한 폭발적 전과는 높이 평가 받아 마땅한 전쟁 초중반기 독일 공군의 숙련도와 기체 성능, 독일 공군의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의 효율성과 형편없던 상대 소련 공군이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독일 공군이 아주 순탄치만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루프트바페는 수장인 헤르만 괴링 장군을 포함한 구성원 상당수가 구 제국 육군 항공대 출신들이었는데 [[포병]] 출신인 [[알베르트 케셀링]] 장군 등 비 항공병과에서 전군한 이들이 유달리 많아 공군의 역할이 [[근접항공지원|지상군의 지원]]에만 집중하는 전술공군으로 고착화되어버렸다.[* 이것은 나치 정권이 군의 재무장을 급속도로 추진하면서 당장 급한 전투기와 급강하 폭격기에 우선 순위를 둔 것도 하나의 이유이다. 빠른 시간에 몸집을 불리다 보니 개발이 오래 걸리는 장거리 폭격기는 후 순위로 밀린 것이다. 거기에 열정적으로 4발 중폭격기(일명 우랄 폭격기) 사업을 추진하던 베버 장군이 사망하고 곧바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당장 급해 보이지 않던 전략폭격기 개발은 취소된다.] 이는 전선에서는 독일 육군에게 든든한 지원군으로 작용했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이 적절한 [[호위기]]와 [[폭격기]] 합동전술의 부재에 따라 혼란에 빠지게 되어 신나는 뇌조 사냥을 당하게 되는 악재로 거듭나게 되고 중후반기 동부 전선에서도 전술 폭격을 제외하고는 오히려 소련 공군에 비해서 폭격 성과가 밀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게다가 괴링은 특유의 권력욕으로 수송기를 사용하는 [[공수부대]]를 넘어서[* 항공기에서 [[낙하산]]을 타고 강하한다는 이유로 공수부대가 공군 소속인 국가들도 여럿 있었다. 전 세계에서 공수부대를 가장 대규모로 운영하는 소련/러시아도 초창기에는 공군 소속이었다.] 공군기갑사단, [[공군 야전사단]] 같은 지상군 부대를 대규모로 만드는, 병력을 낭비하는 일도 했다. 물론 공군 기갑사단은 굉장히 잘 싸워서 육군의 불만을 피할 수 있었지만 공군 야전사단은 그렇지 못해 육군에게 소련군에게 최신 무기를 배달하는 셔틀이라고 비아냥만 들었다. 해군 출신은 그 수가 적은 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13대의 격추 기록을 보유한 해군 항공대의 격추 기록 4위인 에이스 출신의 프리드리히 크리스티안센(Friedrich Christiansen, 1879~1972) 장군[* 최종 계급은 공군 비행대장(General der Flieger), 해군에선 대령까지 진급 후 공군으로 전군했다.], [[해군 육전대]] 출신인 헤르만 람케 장군 정도가 유명하다. 전쟁 후반에는 특히 훌륭한 전투기 조종사 양성프로그램을 통해 조종사를 양성하고 하루에만 1000소티의 폭격기와 700소티의 호위기를 이륙시켰던 미군과 [[영국 본토 항공전]]을 거치며 성장한 영국 공군의 조종사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반면에 동부전선에서는 소련 공군은 숫자 만큼 그 질이 좋진 못했고[* 단 그렇다고 소련 공군의 질이 아주 형편없었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이쪽 공군의 실력도 누적이 되고, 신형기들의 등장과 서방과 독일에 비해서 열악하지만 개전초기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양성체계 등등의 이유로 동부전선의 루프트바페 조종사들도 꾸준히 격추 당하고 있었다.] 이는 일부 부대를 제외하면 44년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육상의 전차 교환비와 마찬가지로 역전은 못하지만 시간이 갈 수록 점점 격차를 줄이는게 문제였는데 1941년에는 3.68이였지만 1944년도에는 3.33까지 떨어진다. 그런데 독일이 그래도 3대는 잡는다라고 하지만 1941-44년 까지의 평균적으로 독일이 3.5 소련이 1이 였는데 문제는 독일은 1을 보충하기가 힘든 반면 소련은 3.5의 보충이 가능했다.] 아돌프 갈란트는 45년에는 항공작전이 제대로 되는곳이 없지만 동부전선은 예외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을 정도. 독일 공군의 조종사 양성 프로그램은 39년 개전 이래로 쭈욱 인력난에 시달렸다. 태평양 전쟁기 미 해병 항공대가 엄청난 수의 전투기 조종사들을 생산해 낸 것을 보면 전투기 조종사 양성이 쉬워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공중전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을 정도의 전투기 조종사를 양성해 내려면 상당히 많은 시간의 훈련이 요구된다. 단순히 전투기를 띄우는 것 외 편대 전술, 붐 엔 줌, 에너지 파이팅등 다양하고 복잡한 전술을 연마하는데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계속된 공중전에 전사한 조종사들을 대체할 조종사들을 양성하는 속도는 느렸고 43년 후반 부터는 대충 어느정도 비행기를 날 줄 아는 히틀러 청년단원들을 선발하여 땜빵하였으나 통할 리가 없었고 이들은 공중전이 벌어지면 제일 먼저 격추되어 버리고 숙련된 고참 조종사들은 이러한 악조건에서 악전고투를 벌이면서 조금씩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전 세계 공군 역사상 전무후무할 전설적인 슈퍼 에이스 부대인 [[JV-44]]가 있었다. 이들은 최신 전투기인 [[Me 262]]를 지급받았으며 부대원들 대부분이 격추수 100, 아니 하다못해 80 정도는 가뿐히 넘어가는 인물들이었다. 하지만 전황이 겉잡을 수 없이 나빠져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는데, [[게르하르트 바르크호른]]조차 JV-44에서 1대도 격추하지 못 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호위기만 1200대, 폭격기는 그보다 더 많이 출격한 상황에서 12대의 Me 262로 여러 대를 성공적으로 격추하고 빠지는 등 최선을 다하였다.[* 애초에 JV-44가 창설된 배경부터 슬슬 [[나치 독일]]이 붕괴되기 시작하고 [[아돌프 갈란트]]가 전투기 총감에서 해임되어 만든 것이니 활약할 수 없는 구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